감상2016. 12. 18. 21:54

 

 눈 뜬 자들의 도시를 읽었다. 원제는 'SEEING'. 눈 먼 자들의 도시와 함께 사 놓고는 지금까지 읽지 않고 두었다가 약 2주 전에 읽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마침내 오늘 몰아서 다 읽었다.

 

 내용은 4년 전 백색실명을 겪었던 나라의 수도에서 선거를 치르는데 사람들이 백지투표를 내면서부터 시작한다. 무효표, 기권도 아닌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채 내는 백지투표.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지 알아보려 하지만 실패하고, 점차 극단적인 작전을 짠다. 

 

 소설은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어떻게든 덮어보려 하면서, 그러면서도 이번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을 통해 각자 자신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총리와 대통령, 장관들의 무능과 잔인함을 실컷 보여주다가, 시점을 바꿔 아직 이 도시에도 정의가 살아 있음을 흥미롭게 보여주다가, 갑자기 비극의 절정에서 끝나 버린다. 마치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다가 2절 후렴에서 전화가 울려 음악이 중단 되듯이.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었지만 전작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보여 주었던 희망이 사실은 휘발성이 강한 거였다고, 혹은 매우 작고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거라서 계획된, 의도적인 절망 앞에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아 책장을 덮는 순간 무거움이 탁 하고 마음을 덮었다.

 

어쩌면 지금이 일요일 밤이라 더 무겁게 느낀 건지도 모른다.

 

눈 뜬 자들의 도시(주제 사라마구, 원제 : SEEING), 2007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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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빈센트 방과후
감상2014. 7. 31. 21:50

오늘 퇴근 길 버스에서 바라본 노을은 타는 듯 붉었다. 붉은 색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데 노을만은 왜 그리도 좋은지 나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붉은 하늘이라도 해돋이는 또 좋아하지 않고.

 

 핏빛 하늘의 아름다움에서는 어딘지 모를 어느 곳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데, 주광성 곤충들이 인간이 만든 인공 불빛 때문에 달빛을 찾지 못하고 타 죽거나 같은 자리를 맴돌다 지쳐 죽는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나 역시 태양에 대해서 그들과 비슷한 맹목적인 그리움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그들처럼 오해하지 않고 태양과 달과 그 외에 인간들이 만든 전기나 불로 만든 빛들을 구분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Posted by 빈센트 방과후
감상2013. 4. 21. 03:43

 

 인간의 크나큰 싸움을 선악의 다툼으로 보는 고지식한 해석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 이 싸움을 비극의 조명 아래서 이해하는 것, 이것은 정신이 이룬 엄청난 성과였다. 이 성과로 인해 인간이 따르는 진리의 숙명적 상대성이 드러났다. 그리고 적을 정당하게 평가할 필요를 고통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도덕적 흑백논리의 생명력을 꺾어 버리지는 못했다. 전쟁 직후 프라하에서 봤던『안티고네』번안극이 생각난다. 비극의 비극성을 죽여 버린 작가는 크레온을 자유를 수호한 영웅을 짓밟아 버린 가증스러운 파시스트로 그리고 있었다.

 

 『안티고네』를 이처럼 정치적으로 구현한 작업들이 2차 대전 직후 상당히 유행했다. 히틀러는 유럽에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비극이 나아가야 할 방향마저 뒤틀어 놓았다. 아마도 그때부터 동시대의 정치사 전부는, 나치주의에 대항하는 전투를 모범으로 삼아 선악 대결의 싸움으로 간주되고 또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전쟁, 시민 전쟁, 혁명 전쟁, 혁명, 반혁명, 민족 전쟁, 저항과 억압들은 비극의 영역에서 쫓겨나 징벌을 내리고 싶어 안달이 난 재판관들의 권위에 휘둘리며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이것은 퇴화일까? 비극 이전의 단계로 인류가 다시 추락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 경우에는 무엇이 퇴화되었던 것일까? 범죄자들에 의해 찬탈되어버린 역사 그 자체일까? 아니면 역사를 이해하는 우리의 방식일까? 나는 종종 우리에게 비극이 사라졌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징벌일 것이다.

 

- 커튼 (밀란 쿤데라 저), 2008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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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빈센트 방과후
감상2013. 2. 25. 23:00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The Forever war), 1975'를 읽었다.

SF물을 읽고 싶다고 하자 SF덕후인 고광일이 빌려준 책이다.

 

 

 줄거리는 여타 전쟁SF소설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 종족 '토오란'에 맞서기 위해 인류는 최첨단 장비로 무장하고 갖가지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그들과 맞서 싸우고, 마침내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다(분명 소설 말미에 토오란과의 전쟁이 종결되는데, 책의 제목이 '영원한 전쟁'이라는 것은 곱씹어 볼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의 메시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반전(反戰)이라고 할 만하다(개인적으로는 인간에게 있어서 유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측면이 더 와 닿는 주제이긴 하지만). 베트남전 참전 용사인 작가는 당시 겪었던 끔찍한 전쟁의 참상과, 전쟁에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느꼈던 이질감을 SF라는 장르를 통해 개인적 경험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다.

 

 전쟁에 참전한 적은 없으나 그래도 2년 4개월이라는 짧은 군복무를 마쳐서인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 주인공 만델라가 느꼈던 감정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상대성 이론으로 증명되는,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와 정지해 있는 물체가 겪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물리법칙에 의해 주인공을 위시한 등장인물들이 우주에서 한 번 전쟁을 치르고 올 때마다 지구는 몇 십년, 많게는 몇 백년이 흐른다. 이로써 주인공과 함께 추억을 나누던 사람은 모두 사라져버렸고, 지구의 문화 역시 만델라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만델라는 처절한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이 소설이 휴고상, 네뷸러 상, 디트머 상,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하게 된 주요한 원동력은 바로 이러한 고립감을 잘 표현해낸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것은 바로 정도의 차는 있겠으나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보편적인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군복무를 하는 동안,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예전과 같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고 나는 차츰 그들에게 잊혀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 괴로웠었기 때문이다. 제대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지금은 예전의 인간관계를 '대부분' 회복했으며 더 나아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기까지 했으나, 입대 전 갖고 있던 추억속의 인간관계는 불가역한 것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떠올리면 일련의 아쉬움과 관계된 감정들이 공진(共振)하는 것은 당연한 과정일 것이다.

 

 결국 객관적인 시간 개념으로 주인공이 태어난 시간보다 약 2000년이나 흘러 주인공과 관련된 것 어느 하나도 지구상에 남게 되지 않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끝을 맺지만, 그래도 이 소설이 슬프지만은 않은 것은 여주인공인 메리게이 덕분이다.

 

 절대로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나, 그 순간을 함께 해온 사람, 추억과 추억 외의 모든 것들(괴로운 기억, 절망감, 슬픈 나날들 등)을 공유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이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 만큼이나 큰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p.s. 마지막 문단에 사족을 덧붙이자면, 추억하는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과 현재를 함께 한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이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순간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더 행복한 일일 것이다.

 

                                                                                                                                             - - 영원한 전쟁 (조 홀드먼 저), 1974년작 / 2012.07.16 월요일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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